오마이뉴스(시민기자), 21.01.15 17:57ㅣ최종 업데이트 21.01.15 17:57
오는 20일 새 대통령 취임을 앞둔 미국 정치권에 암운이 가득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여파로 취임식 자체가 대폭 축소돼 치러질 예정이며 전례로 봐서 참석해야 하는 인사들의 불참 가능성이 크다.
올해 97세의 지미 카터 전 대통령도 불참을 통보했다. 1977년 자신의 취임식부터 시작해 이후 모든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했던 만큼 그의 46대 대통령 취임식 불참 소식은 미국 사회의 뒤숭숭한 분위기를 더욱 실감하게 한다.
코로나19 방역 실패와 함께 커다란 인명 피해와 경기 침체를 야기한 미국 정부이지만 자연적 질병에는 인간의 능력을 벗어난 숙명적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적어도 올해가 가기 전에는 상황이 호전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트럼프가 남긴 유산
▲ 미 의사당 난입한 트럼프 지지자들 지난 6일(현지시각) 미국 워싱턴DC 연방 의회의사당에 난입 난입한 트럼프 대통령 지지자들. (EPA/JIM LO SCALZO) ⓒ 연합뉴스
미국 정치권의 고민은 코로나19가 아닌 다른 데 있다. 현재 정치권을 소용돌이 속으로 내모는 문화적 질병이 있다. 이 질병의 백신은 적어도 수년간은 찾기 어려워 보인다. 4년 전 도널드 트럼프라는 워싱턴의 이방인이 대통령에 당선한 후 정계와 학계, 심지어 정신의학계 전문가들까지 망라한 미국의 지성들이 앞으로 미국이 겪게 될 혼란을 우려했다. 결국 그들의 경고가 기우가 아니라는 게 증명됐고, 이제 미국의 불안한 미래가 실제 가시권 안으로 들어오는 모양새다.
6일 전국에서 모인 트럼프의 열성 지지자들이 워싱턴 의사당을 무력 점거했을 때, 미국은 대의 민주주의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수치스러운 광경을 전 세계에 보여줬다. 그날의 미국 의사당 폭동은 유일한 초강대국 미국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난 사건이었으며, 정치 안정을 내세우는 대통령제가 어떻게 한순간에 포퓰리즘으로 전락할 수 있는지 생생하게 보여주는 역사의 현장이었다.
민주당과 그 지지자들은 들끓었고 이제 공화당 진영 내부도 선을 넘은 트럼프 대통령의 언행과 그를 둘러싼 열성 지지자들의 집단 난동에 동요하고 있다. 과연 미국은 도널드 트럼프 시대 4년을 민주주의 역사의 온전한 한 장(章)으로 기록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으면 국가의 이름으로 민주적 절차의 실패를 인정하고 대통령에게 행상책임(行狀責任, 법을 대하는 그릇된 태도에 대한 책임)을 물어 파면할 것인가? 미국은 갈림길에 서 있다.
미국의 대통령을 파면하기 위해서는 두 단계의 절차가 필요하다. 먼저 하원의원 과반의 찬성으로 대통령을 탄핵소추 하게 되면, 그다음 상원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최종 승인이 이뤄진다.
지금까지 미국에서 대통령 탄핵이 최종 승인된 사례는 없었다. 17대 앤드루 존슨 대통령과 42대 빌 클린턴 대통령은 하원의 탄핵소추가 통과됐지만, 상원 표결에서 승인을 위한 3분의 2선을 넘지 못해 탄핵을 가까스로 모면했다. 37대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경우 상원에서도 승인이 될 가능성이 커지자 스스로 사퇴의 길을 택했다.
미국 하원은 13일(현지 시각) 시위대의 의회 난입 사태 선동 책임을 물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소추안을 찬성 232명, 반대 197명의 과반 찬성으로 가결했다. 하지만 상원은 여전히 공화당이 다수다.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공화당 상원의원들이 갈수록 늘고 있지만, 찬성을 위한 3분의 2선을 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의 임기 종료까지는 1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
결국 의석수로 보나 시간으로 보나 트럼프 대통령의 임기 종료 전에 탄핵하기는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런데도 민주당은 왜 임기가 1주일도 남지 않은 대통령을 상대로 성공 가능성이 크지 않은 탄핵을 시도하는 걸까?
트럼프 대통령은 이제 며칠 후면 임기를 마치고 물러난다. 하지만 이미 미국 사회, 특히 특정 계층에 깊이 스며든 그의 정치적 유산은 그의 퇴진과 무관하게 기존의 정치 이념들과 충돌하면서 앞으로 미국 사회를 뒤흔들 잠재적 에너지를 충분히 확보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민주당의 정치적 상대는 더는 자연인 도널드 트럼프가 아니다. 조 바이든 차기 대통령과 민주당이 상대해야 할 대상은 트럼프 대통령이 4년간 남긴 정치적 흔적을 양분 삼아 앞으로 미국 사회를 천천히 잠식할 새로운 유형의 포퓰리즘이며, 그러한 동향을 세계는 이제 트럼프주의(트럼피즘 Trumpism )라고 부른다.
혹자는 트럼프라는 이름 뒤에 '주의'를 붙이는 신조어에 즉각적인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그가 과연 정치적 이념이나 노선을 위해 일관된 학문적 또는 철학적 원리를 남기기라도 했느냐는 합리적 비판이다.
하지만 상아탑 속이 아닌 현실 정치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 스타일과 소통 방식은 이미 많은 대중 속으로 스며든 것이 현실이다. 그의 말 한마디, 손짓 하나에 수천만 명의 유권자가 열광하고 있다. 그들 가운데 핵심 계층은 지금까지 정치적 엘리트들에게 자신들의 권리가 짓밟혔다고 굳게 믿는 미국 시민이며, 그들이 짓밟혔다고 믿는 그들의 권리는 바로 천부적(天賦的) 권리다.
그들만의 천부인권
▲ 의사당 난입사태 과정서 피 묻은 미 제12대 대통령 흉상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극렬 지지자들이 워싱턴 DC의 연방의회 의사당에 난입한 다음 날인 7일(현지시간) 의회 홀에 전시된 재커리 테일러 제12대 미국 대통령의 흉상에 누군가의 피가 묻어있다. 의회 측은 임시방편으로 이를 비닐로 가렸다. (워싱턴 AFP/Getty=연합뉴스) ⓒ 연합뉴스
그들에게 천부적 권리는 18세기 유럽의 계몽주의에서 유래해 유엔이 1948년 국제법으로 정한 천부인권(Natural Rights)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오히려 천부인권과 천적 관계이며, 천부인권 사상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천부적 권리가 짓밟혔다고 생각한다.
계몽주의에서 유래한 천부인권은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인간답게 살 기본 권리이며 이 권리 앞에는 인종도, 국적도, 성별도 없이 인간만이 있을 뿐이다. 반면 트럼피즘을 추종하는 이들에게 천부적 권리는 '오로지 자신들에게' 주어져 있는 권리를 말한다.
미국이 건국되었을 당시, 더 정확히는 4대 제임스 매디슨 대통령 당시, 미국의 매파 세력 내부에는 자신들이 영국에서 독립하고 신대륙을 정복하는 데에는 신에게서 부여받은 천명이 있었다고 믿는 사상이 있었다. 훗날 언론인 존 오설리번(John O'Sullivan)은 이를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이라고 명명했으며 이후 이 사상은 미국의 모든 정복 활동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 사상에 따르면 토착 인디언들을 배척하고 몰아내는 것도 신이 부여한 권리이자 의무이고, 그것이 자신들의 운명이다. 결국 첫 이민자들과 그의 후예들인 백인들에게 주어진 천부적 권리이자 의무가 이렇게 생겨났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생각은 천부인권 사상과는 근본적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다. 자신들에게만 부여된 미국에서의 고유 권리가 타 인종, 타 종교, 타 국적 사람들에게 침해 당하면 그것은 자신들의 명백한 운명에 대한 정면 도전에 해당한다. 따라서 신이 부여한 자신들의 권리를 반드시 지켜내야만 한다.
결국 이들에게 기독교는 천부적 권리의 근원이 되고, 인종주의는 천부적 권리의 조건이 되며, 국가주의(nationalism)는 천부적 권리의 현실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세속주의의 이름으로 학교는 인종 간 평등을 가르치고, 종교의 자유를 가르치며,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정치권은 세계주의를 말하고 있으니 이들에게 미국은 수십 년간 뭔가 잘못 돌아가는 나라였다.
그들의 신념과 현실 사이에 괴리가 깊어질 때 그들의 눈앞에 트럼프가 나타났다. 그리고 기적처럼 그는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이제 그들은 트럼프 대통령에게서 그들이 잃고 살았던 기독교 사상과 함께 미국 땅을 개척한 백인들의 정체성을 찾았다. 그동안 잊고 있던 미국의 '명백한 운명'을 재건할 때가 온 것이다. 그것이 곧 마가(MAGA : Make America Great Again) 복음이다.
마가(MAGA) 복음 :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 공항에 모인 지지자 향해 주먹 쥐어 보이는 트럼프 퇴임을 8일 앞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2일(현지시간) 텍사스주 할링전의 밸리 국제공항에 도착해 지지자들을 향해 주먹을 쥐어 보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미국-멕시코 국경에 건설된 장벽 완공을 기념하기 위해 이곳을 방문했다. (할린전 AFP/게티이미지=연합뉴스) ⓒ 연합뉴스
트럼프 대통령은 이제 물러나지만 트럼프주의는 이제 시작이다. 그리고 새로운 정적을 만난 미국 민주당은 자신들의 새로운 정치적 존재 이유를 찾았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트럼프주의자들과 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 윈윈 게임이 시작됐다.
반대로 공화당원들의 고민은 깊어가고 있다. 민주당에 동조하자니 자신들의 존재 이유가 보이지 않고, 트럼프주의자들과 손을 잡자니 전통적 보수 가치에 반한다. 국제 사회에서도 고립될 위기에 처하게 됐다. 세계 경찰의 기대는 접어야 할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보수의 품격과 가치가 농락 당하고 천박해지는 꼴을 지켜봐야 한다.
지난 4년의 미국보다 앞으로 4년의 미국이 몇 배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미국의 전통적 정치 세력들은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다시 찾을 수밖에 없게 됐다. 필요하다면 재건 수준의 고통이 필요할 수도 있다. 트럼프는 퇴진하지만 트럼피스트들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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