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A 타이거즈, 박흥식 감독대행 부임 이후 8승 2패 가파른 상승세
-팀 분위기 쇄신에 과거 감독대행들과 차별화된 행보도 눈길
-“준비된 지도자” 평가…100경기 남겨두고 소신 운영이 당연하단 평가도
-소극적 감독대행 대부분이었던 프로야구, 박 대행의 ‘적극적’ 대행 행보 눈에 띄네
[엠스플뉴스]
정부조직법 제12조엔 대통령 유고시 권한대행 서열이 나온다. 최우선 순위는 국무회의 부의장인 국무총리다. 총리도 자리에 없을 땐 재정경제부 장관-교육인적자원부 장관-과학기술부 장관이 순서대로 직무를 대행한다. 그래서 2004년 3월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탄핵당했을 때, 63일 동안 직무를 대행한 것은 고건 당시 총리였다.
야구에도 권한대행이 있다. 시즌 중 갑작스럽게 사령탑이 물러나면, 구단에서는 코칭스태프 가운데 한 명에게 감독대행을 맡겨 남은 시즌을 마무리한다. 정부와 달리 야구감독 서열에 대한 관계법령은 따로 없다. 대개 자리를 이어받는 것은 1군에서 시즌을 함께 해 온 수석코치, 혹은 2군에서 사령탑 역할을 해온 2군 감독이다.
김기태 전 KIA 감독의 사퇴로 KBO리그 역사에 또 한 명의 감독대행이 추가됐다. 박흥식 KIA 감독대행은 역대 프로야구 58번째 감독대행이다. 감독의 해임 혹은 사퇴로 자리를 이어받은 사례만 따지면 역대 40번째다. 시즌 44경기를 치른 시점에 대행직을 맡은 박 대행은 1995년 쌍방울 김우열 대행(102경기)과 2017년 한화 이상군 대행(101경기)에 이어 역대 세 번째로 많은 100경기를 지휘하게 됐다.
“지금까지 이런 감독대행은 없었다” 박흥식 대행의 소신 행보
지금까지 대부분의 감독대행은 ‘소극적 대행’에 가까웠다. 감독대행은 대개 전임 감독이 팀을 떠난 뒤 팀 성적과 분위기가 최악인 상황에 대행 자리에 앉는다. 무너진 팀이 대행 체제에서 극적인 성적 반등을 이루긴 쉽지 않다. 그보단 수장 교체로 어수선한 분위기를 수습하고, 남은 시즌을 안정적으로 마무리하는게 최우선이다.
전임 색채를 지우고 자기 색깔을 내기도 쉽지 않다. 다수의 감독대행에겐 그럴만한 권한이 주어지지 않는다. 당장 시즌 끝난 뒤에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게 감독대행이란 자리다. 실제로 역대 KBO리그 감독대행 33명 중에 정식 감독이 된 경우는 14명밖에 없었다. 권력의 풍향에 민감한 코치들, 선수들을 상대로 강한 리더십을 발휘하기 쉽지 않은 조건이다.
2017년 김성근 감독 사퇴로 대행직을 맡았던 이상군 감독대행(현 스카우트팀장)은 ‘소극적 대행’의 대표적인 케이스다.
이 대행은 한화의 101경기를 지휘하는 동안 시종 철저하게 자세를 낮췄다. 전임 감독이 쓰던 감독실 대신 코치실을 사용했고, ‘감독’이란 호칭에도 손사래를 쳤다. 선수 육성과 부상관리에 초점을 맞춘 무난한 운영으로 남은 시즌을 보냈다. 지난해 한화가 오랜 암흑기를 끝내고 포스트시즌 진출을 이룬 데는, 관리자 역할을 무난하게 수행한 이 대행의 공도 적지 않았다.
지난 시즌 김경문 감독 사퇴로 단장에서 감독대행 자릴 맡았던 유영준 대행(현 2군 감독)도 비슷한 예다. 유 대행은 구단의 계획을 그라운드에서 그대로 실행하는 역할에 충실했다. 유 대행 체제에서 NC는 프런트가 추구하는 야구를 방지턱 없이 곧장 경기장에서 구현하면서 2019시즌을 준비했다.
KIA 박흥식 감독대행은 다르다. ‘수습’에 주력한 이전의 소극적 감독대행들과는 달리, 박 대행은 5월 17일 부임 이후 시원시원하고 자신감 넘치는 행보로 ‘적극적’ 감독대행의 차별화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박 대행은 지휘봉을 잡은 뒤 1군 코칭스태프부터 개편했다. 소폭 개각이 아닌 전면 개각을 단행했다. 총괄코치 보직을 없앴고, 김민호 야수총괄코치를 수석코치로 임명했다. 1군 투수코치 2명과 타격코치를 2군에 보냈고 2군 코치 2명을 1군에 불러 올렸다. 코치진 개편은 박 대행의 요구를 구단이 받아들여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외부와 ‘소통’도 이전보다 활발해졌다. 김기태 전 감독 시절엔 경기전 취재기자 질의응답이 별도의 인터뷰룸에서 진행됐다. 시간은 길지 않았다. 김 전 감독은 예민한 문제나 선수 평가에 대해선 극도로 말을 아꼈다. 그보단 라인업 공개, 선수 칭찬만 한 뒤 짧게 끝날 때가 많았다.
반면 박 대행은 취임 이후 경기전 인터뷰를 별도 공간 대신 더그아웃에서 진행할 것을 제안했다. 투수진 운영이나 선수 기용 계획에 대해서도 시간을 들여 상세하게 공개한다. 예민한 문제엔 말을 아꼈던 기존 대행들과 달리 까다로운 질문에도 막힘없이 자신의 생각을 설명한다.
최원준의 3루수 고정, 원칙 있는 불펜 기용, 젊은 투수 위주의 로테이션 구성 등 이전 체제와 차별화된 선수단 운영도 눈에 띈다. 이 과정에서 필요할 때는 전임 체제에서 나타난 문제점을 언급하기도 한다. 28일 경기에선 안치홍을 1루로 보내고 김선빈을 2루로 기용하는 색다른 라인업도 선보였다. 젊은 선수들로 내야진을 재구축하기 위한 장기 포석이다.
박 대행은 베테랑들을 향해 “전반기 끝날 때까지 시간을 주겠다”며 “몸값을 해야 한다”는 강력 경고장을 보냈다. ‘둥글게 둥글게’를 추구했던 과거 대행들에게선 볼 수 없던 면모다. 선수들에겐 “팬들에게 사인 잘해드리라”는 당부도 했다. 경기장 안은 물론 경기장 밖까지도 두루 신경 쓰는 모습이다.
이런 박 대행 체제에서 KIA는 놀랄 만큼 짧은 시간에 분위기 반전을 이뤘다. 시즌 초반 장기 연패와 팬들의 비난에 무거웠던 공기가 걷혔고, 젊은 선수들과 새로 올라온 코치진이 만드는 활기찬 분위기가 가득하다.
대행 체제 이후 성적도 상승세다. 10경기 8승 2패, 2017년 이후 2년 만에 7연승도 거뒀다. 평균 9,968명으로 리그 7위였던 홈 관중은 5월 17일 이후 평균 11,892명(기간 5위)을 기록했다. 성적 상승과 분위기 변화에 광주 홈 팬들도 서서히 호응을 보내는 분위기다. 방송 관계자는 “시즌 초반 크게 하락했던 KIA 경기 시청률이 최근엔 예년 수준으로 회복되는 분위기"라 귀띔했다. 28일 대전 KIA-한화전은 2.21%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야구인 평가 “100경기 남겨둔 KIA, 감독대행이 소극적 운영할 이유 없다”
박흥식 감독대행의 ‘적극적’ 행보는 그간 소극적 감독대행에 익숙했던 야구계에 신선한 자극이다. 지금까지 이런 스타일의 감독대행은 없었다. 김성근 감독 경질 이후 대행을 맡았던 이만수 전 SK 감독 외에는, 이처럼 적극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행보를 보여준 감독대행은 좀처럼 드물었던 게 사실이다.
야구계에선 박 대행에 대해 ‘준비된 지도자’란 평가가 많다. MBC 청룡 시절 코치로 박 대행과 함께했던 박용진 전 한화 2군 감독은 “박흥식 대행은 능력 있는 지도자다. 미국에서 생활하던 시절부터 공부도 많이 했고, 자신만의 야구 이론이 잘 정리돼 있다. 선수와 소통할 줄 아는 좋은 지도자”라고 평가했다.
KIA 1군 코치와 퓨처스 감독을 지내면서 팀의 모든 선수를 두루 파악하고 있고, 팀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유능한 지도자로서 누구나 수긍할 만한 실력과 경력을 갖췄고, 소속 선수와 구단에 대한 파악이 잘 돼 있는 만큼, 자신과 확신을 갖고 소신 있게 대행직을 수행할 수 있단 얘기다.
구단에서도 박 대행이 적극적으로 팀을 이끌 수 있도록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KIA 관계자는 “‘대행’자가 붙었을 뿐이지 감독대행도 감독으로서 권한과 역할을 수행하는 건 마찬가지다. 대표이사님과 단장님도 박 대행에게 소신껏 팀을 이끌어 달라고 요청했다”고 설명했다.
박 대행과 오랫동안 교류를 쌓은 야구 관계자는 “박 대행은 100경기나 남겨둔 상황에서 지휘봉을 잡았다. 과거 기준으로는 거의 한 시즌 동안 팀을 이끄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행이 성적을 포기하고 관리와 수습만 한다면 그게 오히려 직무유기일 수 있다”며 “감독대행이라고 지나치게 소극적이고 저자세일 이유가 없다. 박 대행처럼 전면에서 이끌어가는 게 지금의 KIA엔 맞다고 본다”고 지지를 전했다.
한 야구인은 “박 대행은 그간 지도자로서 오랜 기간 좋은 평가를 받아왔지만, 아직 지휘봉을 잡을 기회가 없었다”며 “1962년생인 박 대행이 올해 57세다. 40대 젊은 감독을 선호하는 최근 프로야구 흐름에서, 이번 감독대행은 야구인으로서 승부를 걸어볼 마지막 기회다. 눈치보지 않고 소신껏 역량을 보여줄 기회”라 했다.
여기서 말하는 ‘승부’엔 당연히 시즌 뒤 정식 감독 임명 가능성도 포함된다. 다만 아직 정규시즌이 많이 남아있는 만큼, 대행체제에 대한 평가나 차기에 대한 언급을 하기는 이른 시점이다. 최근 10경기 호성적은 팀 분위기 변화에 양현종의 회복세, 타자들의 타격감 회복이 맞물린 결과라는 시각도 있다. 남은 90경기 동안 어떤 고비가 찾아올지는 아직 예단할 수 없다.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박흥식 감독대행이 이전까지 프로야구에서 볼 수 없었던 감독대행의 새로운 모델을 보여주고 있단 점이다. 2004년 대통령 탄핵사태 당시 권한대행을 수행한 고건 당시 총리는 한 일간지와 인터뷰에서 “소극적 대행과 적극적 대행 의미는 없다”며 이렇게 말했다.
“과도기라 할지라도 국정을 정상적으로 운영하는 것이 원칙이다. 적극적으로 해야 할 필요성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가야 하고, 적극적으로 하지 않아도 정상으로 가는 거라면 그대로 가면 된다. 권한대행의 국정운영 원칙은 정상적인 운영이냐 아니냐로 구분하면 된다.” 감독대행에게도 마찬가지 원칙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