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은 ‘박항서 앓이’ 중이다. 지난해 가을 베트남 A대표팀과 23세 이하 대표팀을 총괄하는 사령탑에 오른 박항서 감독은 1년 2개월의 시간 동안 기적과 같은 행보를 거듭했다. 동남아에서도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에 밀려 있던 베트남은 박항서 감독 취임 후 탈 동남아에 성공했다. AFC(아시아축구연맹) 23세 이하 챔피언십 준우승에 이어 아시안게임에서도 4강에 오르며 자국 축구 역대 최고 성적을 물론 동남아 팀 중 가장 높은 성과를 냈다.
그 정점은 지난 15일 베트남의 우승으로 끝난 AFF(아세안축구연맹) 챔피언십 2018(이하 스즈키컵)이었다. 연령별 대표팀이 아닌 A대표팀이 참가한 대회에서 베트남은 10년 만에 동남아 정상에 서며 자긍심이 폭발했다. “베트남은 자존감에 비해 자신감이 부족했다”는 박항서 감독과 이영진 수석코치의 진단은 축구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다. 중국, 프랑스, 미국 등 세계 강대국과의 전면전에서 승리했지만 현대사에 접어들어 경제적, 정치적으로는 동남아에서 리더가 아니었던 베트남은 스즈키컵 우승에 자존감을 대입했다. 박항서 감독은 취임 당시 자신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미션을 달성하며 베트남 국민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줬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베트남의 흥분이 한국에도 그대로 전이됐다는 사실이다. 15일 밤 열린 베트남과 말레이시아의 스즈키컵 결승 2차전은 합산 21.9%의 시청률(SBS 18.1%, SBS스포츠 3.8%)을 기록했다. 동남아 축구가 토요일 황금시간대에 지상파에서 중계된 것도 놀라운데 시청률 지표는 더 경이로웠다. 동시간 대 최고 시청률이었다.
평일 밤에 케이블 채널을 통해 중계된 결승 1차전이 이미 5%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기록하며 방송 관계자들에게 충격을 줬던 스즈키컵 중계는 지상파로도 뜻밖의 성과를 냈다. 프랑스와 크로아티아의 지난 2018 FIFA 월드컵 결승전 지상파 3사 합산 시청률이 20.7%였다는 점을 떠올려 보면 이번 스즈키컵 결승 2차전의 시청률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체감할 수 있다.
스즈키컵의 시청률 대박은 국내 스포츠, 특히 시청률과 흥행 양면에서 고전하는 K리그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믿기 어려운 수치를 분석하는 기본 전제는 극단적 애국심의 비하적 표현인 ‘국뽕’이다. 한국인 박항서 감독이 기적, 마법으로 표현되는 경이로운 성과를 해외에서 거두며 1억명의 베트남 국민들의 영웅으로 등극한 것에 대한 자부심이 스즈키컵에 대한 관심으로 직결된다는 것이다. 과거에도 박찬호, 박세리, 박지성 등의 스포츠 스타가 성공을 거둘 때도 호응이 컸다.
하지만 이번 박항서 감독을 향한 관심에서는 하나의 큰 차이가 있다. 과거의 스포츠 스타들의 성공이 국내 수준을 크게 상회하는 세계 최고의 무대에서 거둔 것인 반면 스즈키컵은 축구 기준에서 변방인 아시아, 거기서도 변방인 동남아 만의 대회기 때문이다.
실제로 베트남은 스즈키컵을 앞두고 한국에서 전지훈련을 치르며 K리그 팀과 세 차례 연습경기를 가져 1승 2패를 기록했다. FC서울에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2군에 유스팀 선수로 급조된 팀이었다. 올 시즌 2부리그인 K리그2에서 최하위를 기록한 서울 이랜드의 리저브 팀에게도 0-2로 패했다. 지난 아시안게임에서도 전력을 기울인 한국은 베트남을 상대로 어렵지 않게 승리를 거뒀다. 적어도 박항서 감독에게 투영한 자부심이 세계 최고의 축구 지도자로 올라섰다는 성격의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박항서 감독은 수준에 상관없이 그 자체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스토리텔링이 있었다. 한국 무대에서 점점 뒷전으로 밀려가던 예순의 베테랑 감독이 마지막 도전이라는 각오로 베트남에 가 땀과 집념으로 일군 성과 그 자체에 한국은 감동했다. 베트남 현지에서 “왜 그런 감독을 데려왔느냐”는 반응에서 시작해 1년 2개월 만에 국부 호치민 다음 가는 영웅으로 등극하는 스토리라인은 부와 명예마저 세습되는 21세기의 한국 사회에서는 보기 힘든 그 자체가 드라마인 성공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스토리를 어떻게 부각시키느냐다. 베트남 언론들은 박항서 감독의 일거수 일투족을 주목했다. 그가 어떤 식으로 선수들의 마음을 사로잡는지, 박항서 감독이 하는 스킨십의 정체는 무엇인지가 세세히 전해졌다. 지난 10월 베트남의 한국 전지훈련 당시 취재를 갔을 때 파주NFC에는 10여명의 베트남 취재진이 상주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국으로 박항서 감독과 베트남 선수들의 작은 소식 하나를 실시간으로 타전하고 있었다.
스토리는 존재만으로 무조건 감동을 주는 게 아니다. K리그에서 가장 성공한 컨텐츠라는 슈퍼매치는 지지대 더비, 연고 이전 혹은 복귀라는 첨예한 반목과 대립의 역사를 바탕으로 삼았다. 하지만 차범근과 귀네슈 두 유명 감독과 화려한 스타들의 대결로 대중들이 쉽게 다가설 수 있는 형태로 부각시키며 비로소 완성됐다. 이제는 그 슈퍼매치도 10년이 지나며 스토리의 새 동력이 없어지고, 양팀의 화려함이 전북, 울산 등에 밀리기 시작하면서 가라앉는 모습이다.
한국에서 스토리와 컨텐츠가 대박 나기 위해선 늘 새로운 업데이트가 필요하다. 전통보다는 트렌드에 더 민감한 우리 사회의 성향을 파악해야 했다. 스포츠에서는 패배와 새드엔딩의 역사도 엄연히 존재하지만 그보다는 성공과 해피엔딩에 더 반응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스즈키컵과 베트남, 박항서 감독의 인기는 ‘수준 낮아서 안 본다’는 주장이 거짓임을 증명했다. 퀄리티보다 흥미를 끄는 게 중요하다. EPL로 대표되는 유럽 축구와 비교해 경기력이 밀려서 대중의 관심 밖에 있다는 K리그의 내적 트라우마는 변명일 뿐이라는 뜻이다. 경기력과 수준에만 집중하는 것은 아마추어 스포츠의 목표다. 스포츠 앞에 프로가 붙었다면 상업적 성공으로 이어가기 위한 포장과 대중 관심 유도가 필수다.
K리그를 보고 유럽 축구나 J리그가 아닌 프로레슬링 WWE를 롤모델로 삼으라는 얘기도 비슷한 맥락이다. ‘기믹’으로 대표되는 다양한 캐릭터와 과장된 쇼, 그것을 마케팅으로 연결하면 실제와 다르다는 걸 알아도 대중은 열광한다. 스포츠의 진정성과 땀, 극적인 승부는 그라운드 안이면 충분하다. 그라운드 밖에서는 그것을 재료로 무수한 컨텐츠들이 쏟아져 나와야 한다. 그 중 팬들은 자신의 성향에 맞는 것을 택일하고 그 숫자가 많아지면 경기장에 모이고 중계를 챙겨본다.
혹자는 스즈키컵으로 재미를 본 SBS가 왜 K리그에는 그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느냐고 질타한다. 올해 K리그 첫 슈퍼매치의 시청률은 0.1%도 되지 않았다. 방송사의 편성은 철저히 대중지향적이고, 상업지향적이다. 대중의 관심은 광고의 쏠림을 만들고 채널의 편성을 움직인다. 박항서 감독만 90분을 쫓아다닌 ‘박항서 CAM’까지 도입된 건 철저히 중계를 소비하는 이들의 요구를 좇은 장치다. 왜 K리그는 그렇게 해주지 않느냐는 할 것이 아니라 그런 매력적인 무대로 만들 필요가 있다. 대중과 언론의 관심이라는 촉매제를 만들기 위해서는 K리그가 더 노력해야 한다.
1년 넘게 야인으로 지내는 동안 시사와 예능, 스포츠 중계 등 다양한 방송을 섭렵하고 온 최용수 감독은 “대중의 호응 없이는 프로스포츠라 말할 수 없다. 선수들을 가르치고, 전술을 고민하는 것만큼 팬들의 바람을 읽어야 한다. 우리 내부의 갈등마저도 스토리로 만들어 공개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부정적인 것을 숨길 수 없다면 그것도 컨텐츠로 삼겠다는 의욕이 필요한 시대다.
스토리를 통한 감정의 전이가 수준 여부를 떠나 거대한 호응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연간 총관중수 150만명 내외, 중계권료 60억원에서 수년째 헤매고 있는 K리그는 스즈키컵 시청률 20%에서 질투가 아닌 교훈을 찾아야 한다.
글=서호정
사진=Getty Images, SBS 제공
기사제공 서호정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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