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사별하고 혼자 살던 정모(85)씨는 5년 전 치매 진단을 받았다. 외국에 살던 딸(60)이 "아버지를 돌보겠다"며 귀국했다. 효도인 줄 알았지만 실은 '가족 전쟁'의 시작이었다. 정씨가 "내 돈이 자꾸 없어지는 것 같다"고 한 게 발단이었다. 다른 자식들이 반신반의하다가 정씨의 자산 현황을 들여다봤다.
딸이 정씨 소유 부동산을 담보로 8억원가량을 대출받고, 예금도 5억원 꺼내 쓴 사실이 들통났다. 딸은 "미국에서 고생했다고 아버지가 가엾게 여겨서 주신 돈"이라고 했다. 정씨는 그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 오락가락했다. 결국 다른 자식들이 '성년 후견인'을 선임해 "아버지 돈을 토해내라"는 소송을 냈다. 성년 후견인은 법원이 치매 등으로 정상적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사람에게 선정해주는 법적 대리인이다.
치매 환자들을 오래 지켜본 전문가들은 "치매 환자를 도와야 할 자식과 이웃이 되레 환자 뒤통수를 치는 경우를 많이 본다"고 했다. 돈을 노리는 경우가 많다. 한국 가구주가 보유한 평균 자산이 40대는 3억원, 50대는 3억6000만원, 60대 이상은 3억3000만원이다. 이 돈을 자신을 위해 쓰는 대신, 허투루 날리고 마는 일이 흔하다는 것이다.
수도권에 거주하던 이모(83)씨도 고가 아파트를 여러 채 보유한 알부자였다. 2015년 그가 치매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자, 주변에서 재산을 노리고 접근하는 이들이 생겼다. 그중 한 이웃이 이씨가 가진 아파트 한 채를 시세보다 6억원 가까이 싸게 넘기라고 꾀었다. 해외에 사는 자식들이 뒤늦게 사정을 알고 간신히 아버지를 막았다.
이런 일이 곳곳에서 벌어지는 건 치매 환자의 약점 중 하나가 '재산 관리'인 까닭이다. 2015년 국민연금공단 조사에서 70대는 23%, 60대는 19%, 50대는 13%가 '부동산'으로 노후 생활을 대비했다고 답했다. 본인이 가진 집이나 건물을 세 놓거나 시세에 맞춰 팔아야 하는데, 그 일이 치매 환자에겐 '미션 임파서블'이기 쉽다. 자기 통장으로 연금을 받아서 꺼내 쓰는 쉬운 일도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할 때가 많다.
자산이 없는 치매 노인에게도 비극은 다가온다. 정부가 생활이 어려운 치매 환자에게 지급하는 각종 '현금 지원'을 가족이 자기 술값·생활비 등으로 써버리는 것이다. 4년 전 치매 진단을 받은 김모(69)씨도 그중 하나다. 김씨 아들은 나라에서 어머니에게 주는 돈을 자기 호주머니에 챙겼다. 박은수 법무법인 율촌 고문은 "치매 노인들이 자산이나 연금, 사회보장 급여를 바탕으로 본인이 원하는 방식으로 살아갈 방법을 우리 사회가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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