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첫 해외순방으로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나토) 정상회의와 이탈리아에서 열린 G7 정상회의에 잇따라 참석했다. 그러나 이같은 자리에서 트럼프 회원국 정상들을 황당하게 만드는 트럼프 대통령의 좌충우돌식 외교 행보가 초래한 후폭풍이 거세다.
두 정상회의가 폐막한 직후 유럽연합(EU)을 대표하는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28일 도널드 트럼프 정부가 들어선 미국을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동맹이라고 공개적으로 시사하는 발언을 했다.
메르켈 총리는 독일을 넘어 사실상 EU의 최고지도자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발언에 곧바로 미국의 보수진영까지 "유럽이 미국과 결별을 선언한 것"이라면서 경악하고 있다.
나아가 트럼프가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워 국익을 관철시키는 외교에 주력하고 있다고 자화자찬을 하고 있지만, 오히려 미국의 국익을 훼손하는 자충수를 두고 있다는 비판이 보수진영에서도 터져나오고 있다.
▲ 지난 25일 이탈리아에서 열린 G7 정상회의에서 메르켈 독일 총리가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건네고 있다.ⓒAP=연합
조지 W. 부시 등 역대 공화당 정부의 사상적 이념을 제공했던 외교안보 매체 <내셔널 인터레스트>의 편집장 제이컵 헤일브룬은 '트럼프는 메르켈이 초강대국 독일을 건설하도록 밀어주는 건가(Is Trump Pushing Merkel to Create A German Superpower?)'라는 칼럼을 통해 "트럼프는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EU를 분열시킬 수 있다고 믿었지만, EU를 더욱 통합시켜 미국의 국익을 훼손하는 결과를 초래하면 어쩔 것인가"라고 지적했다.
그는 "유럽은 미국을 더 이상 동맹국으로 기댈 수 없으며, 우리의 운명은 우리가 개척해 나가야만 한다"는 메르켈 총리의 발언에 대해 "역사적 전환점을 알리는 발언"이라고 평가했다.
칼럼에 따르면, 1945년 이후 역대 미국 정부는 독일과 나토와의 관계에 공을 들여왔다. 그러나 트럼프는 이 전통적 관계를 다른 방향으로 끌고 가고 있다. 이제 메르켈이 이끄는 독일과 최근 취임한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경제와 군사적 관계를 긴밀히 다지는 '독일-프랑스 동맹'을 구축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칼럼은 "이런 변화는 미국의 국제적인 위상과 영향력을 중대하게 훼손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으며, 트럼프가 독일을 유럽의 초강대국으로 나아가도록 자리를 깔아주고 있다는 것"이라고 경고했다.
영국의 일간지 <인디펜던트>도 "메르켈 총리의 발언은 정치적 레토릭 측면에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 것"이라면서 "미국과 영국은 특별한 관계라면, 미국과 독일은 중요성에서는 훨씬 비중이 큰 관계"라고 지적했다.
트럼프는 나토 정상회의에서 나토의 근간인 집단방위를 규정한 나토 조약 5조 준수에 침묵했다. 미국 정상이 나토 5조 준수를 사실상 거부하는 듯한 모양새를 보인 것은 68년 나토 역사상 처음 있는 일로 지적된다.
이에 대해 <인디펜던트>는 "나토 창설의 주목적 중 하나는 1, 2차 세계 대전에서처럼 독일이 유럽평화에 위협이 되는 것을 막으려고 국제기구에 독일을 끼워넣는 것"이라면서 "메르켈의 발언은 미국이 나토에 적극적이지 않다면, 독일과 유럽은 앞으로 훨씬 더 독립적인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시사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트럼프는 나토의 집단방위 의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채 동맹국들에게 "방위비를 충분히 지불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며 나토 동맹국들을 미국 덕에 살아가는 약소국 취급하는 안하무인격인 언행으로 일관했다.
또한 나토 정상회의에서는 정상들이 단체사진을 찍을 때 몬테네그로의 두스코 마르코비치 총리를 팔로 밀치며 앞자리를 차지하는가 하면,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의 악수에서 지나치게 손을 꽉 잡아 기를 죽이려 했으나 젊은 마크롱 대통령이 더 강하게 악수하는 등 일종의 '역공'을 당하기도 했다. G7 정상회의에서는 회의에 지각하거나 폐막식에 불참하는 등 무례한 행동으로 각국 정상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트럼프는 장 클로드 융커 EU 집행위원장과의 회담에서는 "독일 자동차 수백만 대가 미국에서 팔리고 있다"면서 "독일은 나쁘다, 매우 나쁘다"라고 독일의 막대한 대미 무역흑자를 독일의 자동차 수출 탓으로 돌렸다.
독일차가 미국에서 많이 팔린다는 것에 대해 불만을 터뜨린 트럼프의 발언에 대해서도 헤일브룬은 "앨라배마 주 같은 미국 여러 지역에서 독일차가 생산된다는 사실을 트럼프가 모르는 게 분명해 보인다"고 지적했다.
심지어 헤일브룬은 트럼프가 기후온난화를 제어하려는 파리기후협약에서 탈퇴하려는 움직임에 대해서도 심각한 우려를 토로했다. 파리기후협약은 지난 2015년 거의 200개 국가가 참여하고 당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적극적인 지지를 약속한 국제적 합의다.
트럼프 대통령은 정상회의에서 파리기후협약 준수 여부에 대해 침묵한 채 트위터를 통해 "파리기후협정의 잔류 여부를 다음 주에 결정할 것"이라고 대수롭지 않은 문제로 취급했다.
이미 트럼프 정부는 '셰일오일 및 셰일가스' 증산 등 미국내 에너지 생산을 최대화해 연료 가격을 낮추고 에너지 독립을 추진한다는 '미국 우선 에너지 정책(America First Energy Plan)'을 발표했다.
1인당 에너지 비용 부담을 낮춰 경제를 부양하고, 적대적인 국가에 대한 에너지 의존도를 낮추며 미국을 에너지 순수출국 반열에 올려놓겠다는것이 트럼프 에너지 정책의 골자다. 이런 에너지 정책은 온실가스 규제와 대척점에 서있는 정책이다.
하지만 이런 에너지 정책이 당장 미국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것 같지만 장기적으로 미국의 국익을 훼손하는 외교를 하고 있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세게 최대 석유기업 엑손모빌조차 "파리기후협약이 천연가스 등 탄소배출량이 적은 자원과 기술발전을 촉진한다"면서 파리기후협약에 미국이 잔류할 것을 촉구하는 서한을 트럼프 정부에 보냈고, 미국의 에너지업계에서도 전기차, 태양광, 해상 풍력 등 친환경 분야 신산업도 미국이 주도해야 할 시점이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나아가 헤일브룬은 "지금까지 미국의 대유럽 외교의 핵심관계는 독일인데, 이 관계에 균열이 가고 있을 뿐 아니라, 절단이 날 지경에 와 있다"면서 "트럼프가 유럽을 강력한 세력으로 통합시키도록 촉진하고 있다면, 보통 큰 일이 아니다"고 경고했다.
이처럼 '미국의 국익'을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운 트럼프의 좌충우돌식 외교 행보에 많은 전문가들은 향후 유럽과 미국의 관계가 새로운 국면, '트럼프 리스크'가 초래한 불확실성의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평가에 동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