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과 30년 '운명적 동지'..미완의 숙제 '정권교체' 재도전
김지환 기자 입력 2017.04.03. 21:38 수정 2017.04.04. 00:06
[경향신문] ㆍ민주당 19대 대선후보 문재인
“그는 내 삶을 굉장히 많이 규정했다. 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의 삶은 전혀 달랐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운명이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대선후보(64) 인생을 관통하는 열쇳말은 ‘노무현’이다. 유신 반대 시위를 주도하며 치열한 청년 시절을 보낸 문 후보는 사법연수원 졸업 뒤 1982년 부산에서 노무현 변호사를 만났다. 두 사람은 ‘변호사 노무현·문재인 합동법률사무소’ 동업자가 됐다.
2011년 문 후보는 <문재인의 운명>에서 “당신(노무현)은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하지 못하게 됐다”고 썼다. 이 말은 결국 ‘정치인 문재인’으로 홀로서기를 하겠다는 다짐이 됐다. ‘노무현의 30년 지기 문재인’은 2017년 4월3일 ‘민주당 대선후보 문재인’으로 다시 섰다.
■ 어릴 적 가난이 선물한 사회의식
1950년 12월 흥남철수 때 고향을 떠난 문 후보의 부모는 미군 선박을 타고 경남 거제 피란민수용소에 도착했다. 문 후보는 2년 뒤 피란살이 중 태어났다. 초등학교 입학 전 부산 영도로 이사한 문 후보 집안은 가난했다. 성당에서 배급해주는 강냉이가루, 전지분유 등을 양동이에 받아 집으로 가져갔고 기성회비를 내지 못해 수업 중 쫓겨나는 일도 겪어야 했다.
문 후보는 시험을 쳐서 들어간 경남중학교에서 빈부격차를 피부로 느꼈다. 그는 지난 1월 출간한 <대한민국이 묻는다>에서 이렇게 회상했다. “이 학교 애들은 대체로 잘사는 거예요. 집에 가보면 정말로 놀랄 만한 저택에, 정원에,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죠.” 문 후보는 “사회 부조리에 대해 일찍부터 저항심 같은 게 있었던 것 같다”며 어릴 때 경험이 인권변호사의 삶으로 이어진 것 같다고 돌아봤다.
■ 반독재 학생운동 이끈 대학시절
문 후보는 재수해 경희대 법대에 입학했다. 역사학자가 꿈이었지만 부모의 반대로 진로를 틀어야 했다. 1학년 때인 1972년 박정희 정권이 10월유신을 선포했다.
리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고 하숙집에서 밤늦게까지 토론하며 세상에 대한 눈을 떠갔다. 3학년 가을 뜻이 맞는 친구들과 유신 반대 시위를 기획하면서 경희대 학생운동에서 중심적 위치에 서게 됐다. 1975년 총학생회 총무부장을 맡아 유신 반대 시위를 주도했고 구속과 동시에 제적을 당했다.
당시 유신 반대 시위 대학생에 대한 형량은 ‘징역 2년’ 정찰제였지만 사건을 담당한 판사가 징역 10월에 집행유예를 선고하면서 석방됐다. 하지만 곧장 강제징집을 당했다. 훈련소 생활을 마친 뒤 특전사에 배치돼 ‘A급 사병’으로 제대했다.
■ 사시 합격, 그리고 노무현과 만남
제대 이후 복학이 되지 않아 취업 준비까지 했지만 갑작스러운 부친의 죽음 뒤 사법시험을 준비하기로 했다. 49재를 치르고 전남 해남 대흥사 등에서 시험 준비에 몰두했다. 1979년 초 1차 시험에 합격했지만 그해 10월16~20일 부마항쟁이 일어났고, 같은 달 26일엔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됐다.
1980년 3월 복학 후 5월17일 신군부의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두번째 구속됐다. 구속된 지 20여일 후 여자친구였던 김정숙씨로부터 뜻밖의 소식을 전해들었다. 복학한 해 시험 삼아 치른 사법시험 2차에서 합격했다는 것이다. 사법시험 3차 면접 때 안전기획부 요원은 “지금도 옛날 데모할 때와 생각이 변함없냐”고 물었다. 그는 “지금도 생각이 변함없다”고 답했다. “어려울 땐, 무조건 원칙적으로”라는 평소 철학이 이 때도 드러났던 것이다.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졸업했지만 구속 전력 때문에 판사로 임용되지 못하자 부산으로 내려가 노무현 변호사와 동업을 시작했다. 1987년 6월항쟁 당시 부산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를 이끌었던 재야 인사 노무현은 1988년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정치권으로 들어갔다. 문 후보는 “부산, 경남, 울산, 창원 전체에 인권변호사는 고작 서너명이었다. 다들 정치로 가고 나 혼자 남았다”고 회상했다.
■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문 후보는 2002년 말 노무현 전 대통령 제안으로 청와대 민정수석을 맡으면서 국정운영에 참여하게 됐다. 2004년 2월 1년여 만에 청와대를 떠나 ‘자유인’으로 돌아갔다. 히말라야 트레킹 여행 중 국회가 노 전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의결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노 전 대통령 대리인단에 참여했고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이 기각된 뒤 시민사회수석으로 청와대에 복귀했다. 이후 민정수석, 비서실장 등을 맡으며 노 전 대통령 곁을 지켰다.
노무현 정부 출범 첫해 문 후보는 민정수석으로서 화물연대 파업, 철도파업, 전교조의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 투쟁 등을 전담했다. 당시 노무현 정부와 노동계는 감정의 골이 깊었다. 노무현 정부는 노동계가 개혁정부에 대한 기대감 때문에 과도한 요구를 한다고 인식했다. 반면 민주노총은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며 노무현 정부를 공격했다. 시민사회 진영과도 갈등을 빚었다. 이라크 파병,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등을 둘러싸고 관계가 멀어진 것이다. 문 후보는 “이라크 전쟁은 정의롭지 못한 전쟁이었지만 더 큰 국익을 위해 필요하면 파병할 수도 있다”고 했다.
■ 노무현의 죽음
“2009년 5월23일, 오전 9시30분, 그분을 떠나보냈다.” 노 전 대통령이 대검찰청 청사로 출석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비보가 전해졌다. 노 전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관’인 김경수 비서관으로부터였다. “빨리 와주셔야겠습니다. 대통령님이 산책을 나갔다가 산에서 떨어지셨습니다.” 상주가 돼야 했던 문 후보는 노 전 대통령 서거일을 “내 생애 가장 긴 하루”라고 했다. 노 전 대통령 영결식 당시 백원우 민주당 의원 등이 “정치보복”이라며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소리치자, 상주였던 문 후보가 사과하며 예를 갖췄다. 감정을 절제하고 차분히 대응하던 모습이 문 후보의 존재를 각인시켰다.
2011년 노무현 정부를 증언하고 기록하기 위해 내놓은 <문재인의 운명>으로 ‘문재인’을 세상에 알렸다. 2013년 말 출간한 <1219 끝이 시작이다>에선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대선 출마까지 간 것도 결국은 <문재인의 운명> 출간에서 시작됐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 운명처럼 불려나온 2012년 대선과 2017년 ‘재수’
<문재인의 운명> 출간 이후 범야권에선 문 후보를 부르는 목소리가 커졌다. ‘혁신과통합’에서 범야권 통합운동을 하는 데 그치지 말고 “직접 선수로 나서달라”는 요구였다. 통합민주당과 혁신과통합의 합당 뒤 문 후보는 19대 국회의원 선거(부산 사상구)에 출마해 당선됐고, 18대 대통령 선거에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와의 단일화 끝에 범야권 단일후보로 나섰다. 하지만 득표율 48%로 51.6%를 얻은 박근혜 후보에게 패했다.
문 후보는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로 당선됐다. 그는 “3번의 죽을 고비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이후 혁신위원회를 띄우며 당 체질 개선에 나섰다.
하지만 새정치연합 안철수 전 대표는 그해 12월 “이제 당 안에서 변화와 혁신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며 탈당을 선언했다. 이는 제1 야당 분당의 신호탄이었다. 이후 안 전 대표는 탈당자들과 함께 호남을 기반으로 한 국민의당을 창당했다.
문 후보는 당시 “호랑이 등에서 내릴 수 없다”며 “아무리 파도가 높고 바람이 강하게 불어도 총선 승리에 이르는 새정치연합의 항해는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휘청거리는 당 상황을 정면 돌파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지난해 4월 총선 이전 당이 쪼개지고 어려움에 처한 상황에서 입당한 ‘10만 온라인 당원’은 ‘문재인 지킴이’ 역할을 하기도 했다.
문 후보는 지난해 총선을 석 달 앞두고 비상대책위원장으로 김종인 전 대표를 전격 영입했다. 흔들리는 당을 수습하기 위해 경제민주화의 상징적 인물인 김 전 대표를 삼고초려 끝에 영입, 총선을 승리로 이끌었다. 하지만 당내의 ‘친문(친문재인) 패권’ 논란은 최근 경선 과정까지 이어졌다. 김 전 대표는 최근 문 후보와의 갈등 끝에 탈당했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본격화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문 후보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했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에게 밀렸던 문 후보는 국정농단 사태 이후 지지율이 반등하며 현재까지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문 후보는 정치 입문 6년 만에 두 번의 대선 도전사를 쓰고 있다.
<김지환 기자 bald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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