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비즈 도쿄 입력 2012.06.14 03:07 수정 2012.06.14 09:58
"한국도 인구구조 변화에 대해 충분히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과도한 성장에 대한 기대도 버려야 한다."
일본의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의 니시무라 기요히코(西村淸彦) 부총재는 "최근 한국에서 서울 집값은 내리고 지방의 집값이 오르는 것은 일본의 버블 붕괴 직전에 나타났던 것과 유사한 현상"이라면서 "특히 한국은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이 높기 때문에 매우 걱정할 만한 움직임"이라고 말했다.
↑ 일본은행 니시무라 부총재는 한국도 급속히 고령화가 진행되는 만큼, 인구구조의 변화가 주택시장과 경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다양한 시나리오를 마련, 대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유럽과 미국의 경제위기는 버블붕괴에 따른 채무구조 조정과 인구구조 변화가 겹치는 시기인 만큼, 장기화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도쿄=차학봉 특파원
↑ 잡초가 무성한 도쿄 도심의 빈땅. 빈땅 옆 주택도 빈집으로 방치돼 있다. 인구구조의 변화와 경기 침체가 겹치면서 일본의 땅값은 90년대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으며 빈집도 급증하고 있다. /도쿄=차학봉 특파원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그래픽 뉴스로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조선닷컴
도쿄 일본은행 청사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가진 그는 "인구구조의 변화는 경제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친다"면서 "한국도 인구구조의 변화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다양한 시나리오를 마련해 대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예일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도쿄대 교수를 거쳐 2008년부터 일본은행 부총재로 재직하고 있다. 그는 일본 부동산 버블에 대한 연구로 유명하며 작년 1월 미국에서 "미국과 유럽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버블 붕괴 시기와 인구구조의 변화 시기가 겹친 탓에 경기 침체가 장기화될 수 있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내가 논문을 발표했을 때만 해도 서구의 전문가들이 우리와 상관없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나의 주장이 점점 현실화되고 있다"고 했다.
◇고령화와 경제위기 겹쳐… 경기 침체 장기화 불가피
―당초 예상과 달리, 유럽을 비롯한 세계 경제가 장기 침체 조짐을 보이고 있다.
"버블이 생성된 원인은 여러 가지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새로운 번영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식의 지나친 낙관주의가 만들어 냈다고 생각한다. 언제까지나 성장이 계속될 것이라고 전망하면서 빚을 내 주택 같은 자산을 계속 사들이고, 정부도 지출을 확대해 버블을 키웠고, 결국 버블 붕괴로 이어졌다.
버블 붕괴의 후유증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채무 조정 과정이 필요하다. 서구의 전문가들은 당초 금융·재정 정책을 동원하면 단기간에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과거와 근본적으로 바뀐 것이 있다. 인구구조의 변화이다. 지금까지는 생산가능인구(14~64세)가 늘어나면서 성장률을 높이던 시대였지만,
이제는 반대로 인구구조가 성장에 마이너스가 되는 시대가 됐다. 이런 전환기에 공교롭게도 버블의 붕괴가 겹쳤다. 미국, 아일랜드, 스페인 등 많은 나라가 생산가능 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한 시기와 버블 붕괴가 겹쳤다."
―그렇다면 경기 침체가 상당히 장기화될 것이라는 것인가.
"일본도 처음에는 경기 침체를 단기적으로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수요만 늘리면 될 줄 알고 여러 가지 정책을 폈다. 하지만 최근에야 인구구조의 변화가 경기 침체를 가속화시켰다는 것을 뒤늦게 파악했다. 인구구조가 변한 상태에서는 지금까지의 정책이 통하지 않을 뿐 아니라 또 정책을 펴도 극복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린다."
◇일본화(장기 침체)는 미국·유럽도 당면한 문제
―하지만 일본 정부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잃어버린 20년'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지 않나.
"'일본화(japanification·장기 침체)'라는 단어는 아주 특별한 상황에 빠졌다는 의미였다. 특수한 상황은 금융·재정정책을 사용해 비교적 간단하게 피할 수 있다는 의미로 사용됐다. 그러나 이는 문제의 설정이 잘못된 것이다. 내가 보는 일본화란 고령화에 동반해 사회의 신축성과 유연성이 떨어진 상황에서 버블이 붕괴돼 과잉 채무 조정을 겪어야 하는 상황을 의미한다.
과거의 경기 침체 때보다 극복하기가 훨씬 어렵다는 의미이다. 이런 의미의 일본화는 고령화 문제에 직면한 미국과 유럽도 모두 직면해 있다."
(리먼 쇼크 이후 서구의 전문가들은 정책의 무능함에 의한 장기 침체라는 의미로 '일본화'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그들은 정부의 적극적인 재정·금융정책으로 일본화를 피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한국도 생산가능 인구가 2016년을 정점으로 감소할 것으로 예상되는 등 인구구조의 변화에 직면해 있다.
"경제가 캐치업(catch-up) 단계일 때는 성장률이 높다. 하지만 한국도 캐치업 단계가 끝나가고 있고 인구구조도 경제 성장에 불리하게 바뀌고 있다. 과거와 같은 높은 성장률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캐치업 단계란 선진국을 모방해 경제가 성장하는 단계를 말한다. 이 단계를 넘어서면 모방이 아니라 스스로가 혁신을 주도해야 하는데, 그 과정이 어렵기 때문에 이 단계에선 성장률이 떨어지는 게 일반적이다.)
◇서울 집값 내리고, 지방 집값 오르는 것은 일본 버블 붕괴 직전의 모습
―한국도 일본처럼 부동산 가격이 급락하지 않겠느냐 하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한국에서 서울 집값은 내리고, 지방의 집값이 오르는 것은 일본의 버블 붕괴 직전에 나타났던 것과 유사한 현상이다. 일본의 경우 1980년대 도쿄의 땅값이 급등하고 이어 전국의 땅값이 올랐다. 1987~88년에 도쿄 땅값이 내려가기 시작하자 이번엔 지방이 올랐다. 이어 다시 도쿄의 땅값이 오를 즈음에 비로소 버블이 붕괴했다."
당시 일본 정부와 전문가들은 부동산 가격이 내려가는 이유가 수요가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내놓았고 수요만 늘리면 다시 회복될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니시무라 부총재는 그 같은 판단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다고 말했다.
최근 한국 정부도 서울 등 강남권 집값 하락이 세금 등 규제로 인한 수요 부족이 원인이라며 규제 완화를 통해 수요를 늘리는 정책을 펴고 있다. 니시무라 부총재의 논리대로라면 강남권 부동산 가격의 하락 원인이 인구구조 변화 등 경제구조와 관계가 있는 만큼, 한국 정부의 부동산 가격 부양책은 효과가 없는 정책이라는 말이 된다.
―한국은 어떻게 대비해야 하나.
"과도한 성장에 대한 기대를 버려야 한다. 물론 그것은 쉽지 않다. 모두 과거의 상태가 지속할 것이라고 낙관한다. 인구구조의 변화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국민적인 토론을 통해 미래에 대한 견해를 공유해야 한다. 노동인구는 20여년 전에 이미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예측이 가능하다.
캐치업 단계가 끝나가기 때문에 노동생산성도 지금과 같은 성장세가 유지되지 않는다는 것이 예측 가능하다. 예를 들어 1980년대 일본 정부는 사무실 수요가 큰 폭으로 늘어날 것이라고 예측해 과도한 투자를 부추겼다. 이런 일본의 경험을 감안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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