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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21세기 나의조국 2011. 5. 17.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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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 안치환 - 임을 위한 행진곡
작곡 김종률 · 백기완 시 '묏비나리' · 노래 안치환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
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임을 위한 행진곡>의 탄생 비화








‘임을 위한 행진곡’ 악보 원본.







전 국민의 애창곡이 된 '임을 위한 행진곡' 어떻게 탄생했을까

'임을 위한 행진곡' "4시간 만에 탄생한 노래, 35년 질곡의 역사 겪다"

1982년 윤상원·박기순의 영혼 결혼식 모티브로
작곡가 김종률 "5월 광주 음악으로 응축돼 발현"
2009년부터 종북 논란 속 기념식서 제창 안 돼
"민주주의의 열망 담은 노래..제자리 찾은 것"



 “‘임을 위한 행진곡’은 4시간 만에 탄생한 노래다.”‘임을 위한 행진곡’을 작곡한 김종률(59·현재 광주문화재단 사무처장·이하 사무처장)의 회상이다.

김 사무처장은 전남대 출신으로 대학가요제에서 수상한 바 있다.
김 사무처장은 “돌아보면 1980년 5월부터 광주에서 봐왔던 모든 것이 그날 음악으로 응축돼 발현된 것 같다”고 말했다.

가사는 백기완 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1980년 12월 서대문구치소 옥중에서 지은 장편시 ‘묏비나리’를 바탕으로 황석영이 직접 썼다.


△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임을 위한 행진곡’은 5·18 당시 전남대 경영학과 학생이었던 김종률이 1982년 5·18 2주기를 기념하는 문화제를 준비면서 만들었다.

소설가 황석영의 제안으로 제작한 30분 분량의 노래극 ‘넋 풀이-빛의 결혼식’의 마지막 곡으로 처음 쓰였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작곡한 김종률 광주문화재단 사무처장.





노래극의 주인공은 연인 사이였던 윤상원과 박기순이다. 시민군 대변인이었던 윤상원은 5·18 당시 전남도청을 점거하다 계엄군에게 사살됐다.

이후 ‘들불야학’을 운영하다 1979년 사망한 후배 박기순과 영혼결혼식을 치렀다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노래극을 만들었다.
노래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두 주인공의 장엄한 행진을 위해 만든 노래였다.


김 사무처장은 “이 노래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민주주의를 열망하면서 희생된 분을 기리는 노래”라고 강조했다.
김 사무처장은 9년 만에 제창이 결정된 것에 대해서는 “이제야 ‘임을 위한 행진곡’이 제자리를 찾게 된 것”이라고 평했다.
김 사무처장은 “앞으로 문화예술로 승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이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1983년부터 30여 년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제창됐다.
 전두환 정권 때였던 80년대에는 금지곡으로 지정돼 ‘불법 테이프’와 시위 현장을 중심으로 구전돼 전해졌다.




광주민주화운동 1980년





1997년부터는 정부주관 공식기념식에서 제창하며 그 의미를 이어왔다.

정식으로 녹음돼 발표된 것은 1991년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의 3집 음반부터였다.

안치환과 자유, 서영은, 블랙스완 등이 여러 장르로 불러 대중에게 알렸다.

5·18민주화운동을 다룬 영화 ‘화려한 휴가’에도 쓰였다.

외국에서도 ‘임을 위한 행진곡’을 노동자 투쟁가로 부른다.
일본·대만·홍콩·필리핀 등 아시아 노동계를 중심으로 불리고 있다.

2016년 6월에는 타이완 중화항공 파업 현장에서 불려 화제가 됐다.



3집음반을 녹음하고 있는 '노찾사' 멤버들.


'노찾사' 3집음반 자켓.



‘임을 위한 행진곡’은 2009년부터 논란에 휘말리기 시작했다. 보수 진영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종북으로 몰아갔다.
이명박 대통령 집2년 차인차인 2009년 5·18민주화운동 기념행사 공식 행사에서 배제돼 식전 행사로 제창했다.


2010년에는 국가보훈처가 ‘임을 위한 행진곡’ 대신 경기도 민요 ‘방아타령’을 기념 식순에 편성해 논란을 증폭시켰다.
2011년부터는 제창이 아닌 합창으로 형식을 바꿔 5·18 피해 당사자와 유가족의 불만이 잇따랐다.


이기봉 5·18기념재단 사무처장은 “올해는 5·18민주화운동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지 20년이 되는 해다.

그래서 이번 ‘임을 위한 행진곡’의 제창 결정이 더욱 의미가 있다”고 전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 진입한 계엄군들의 모습.







'임을 위한 행진곡' 원작자 백기완 "이제 민중과 역사의 것"



‘임을 위한 행진곡’이 5.18민주화운동기념식 제창곡으로 다시 지정된 12일 서울 대학로 통일문제연구소에서 만난 이 곡의 가사 원작자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은 “(제창곡 재지정과 관련) 아주 당연하고 바람직한 일”이라고 말했다. 노랫말의 모태가 된 자신의 장편 시 ‘묏비나리’에 대해서는 “감옥 독방 찬 시멘트 바닥에 드러누워 있노라면 분하고 너무 약이 올랐다. 그때마다 ‘용기를 내라’고 스스로를 달구질하고 세상을 을러대던 나를 일으켜 세운 비나리였다”고 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원작자로 알려진 재야운동가 백기완(85) 통일문제연구소장의 대답은 짧고 단호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 5·18 민주화 운동 기념식 제창곡으로 다시 지정됐다. 이명박 정부 출범 2년째부터 제창이 금지됐으니 무려 9년 만이다.

제창 부활 소식이 알려진 이날 이데일리가 서울 대학로에 위치한 통일문제연구소에서 백기완 소장을 만났다.

백 소장은 “그저 노래를 못 부르게 한 것이 아니라 5·18 정신을 학살하고자 하는 전두환-이명박-박근혜 정부의 만행이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새로운 대통령이 제창을 지시한 것은 잘 했다”고 평가했다. 다만 “이제 시작이다. 좀 더 두고 봐야 하지 않겠나. 하도 망쳐놔서 바로 잡아야 할 게 한두 가지 아닐 것”이라고 새 정부를 향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옥중서 스스로를 달구질 한 詩, 민중의 노래되다 

‘임을 위한 행진곡’ 노랫말의 모태가 된 ‘묏비나리’는 1979년 말 YWCA위장결혼식사건의 주모자로 붙잡혀간 백 소장이 모진 고생을 하며 서울 서대문구치소 옥중에서 1980년 12월 지은 15장의 장편 시(詩)다. 그에 따르면 ‘뫼’는 산을 뜻하고, ‘비나리’는 행복을 비는 말이자 민중의 자생적이요 자주적인 시문학 중 하나다.  
 
당시 고문을 당해 허리는 망가졌고, 두 무릎은 퉁퉁 붓고 곪아 꿇을 수조차 없었다고 했다.

연필도 종이도 없어 뭘 적을 수도 없던 시절, 찬 시멘트 바닥에 드러누워 천장에 매달린 15촉 전구를 보고 있노라면 분하고 너무 약이 올랐다고 백 소장은 회상했다. 
 
“그때마다 매일 주문처럼 외우고 또 외웠어. 나를 일으켜 세우는 비나리를 하는 거야. ‘너도 한때 씨름도 잘하고 술도 잘 먹었잖아. 너도 젊은 날이 있었어. 용기를 내 이 자식아’ 하고는 내가 나한테 달구질 하는 거야.” 

이렇게 쓰여진 시들은 고문 후유증으로 한양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당시 몰래 라면봉지 같은 데 적어 후배들에 의해 밖으로 내보내졌다고 했다.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면서 지금까지 ‘민중의 애국가’ 오월 광주를 대표하는 한국 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노래로 자리 잡았다.

“나만 달구는 게 아니라 아울러 세상을 을러대는 거지. ‘이것 봐. 기죽지 말어. 역사라는 것은 부정한 자들의 싸움이 역사야’하곤 천장을 보고 매일 읊었지.”



△“원작자라고 한 적 없어”…예술은 민중과 역사의 것

가사의 원작자인 백 소장은 이 노래에 대한 소유권도 저작권도 가지고 있지 않다.

“나더러 원작자라고 하는데 나는 단 한 번도 그렇게 말한 적 없어. 작품이라고 하는 것은 소유하는 건물과 달라. 자본주의적 관계가 아니지. 민중의 것이고 역사의 것이야.”

노래는 많이 불리지만 시의 존재를 모르는 이들이 더 많은데 서운하지 않냐는 질문에는 “개의치 않다.
자연스러운 예술의 흐름이다”며 웃었다. “작품은 예술이기 때문에 세상 밖으로 나오면 독자의 것, 노래를 부른 사람의 것이야.” 

‘임을 위한 행진곡’이 지금까지 불리는 힘은 무엇일까. 백 소장은 “광주항쟁이 지역적 의미에 그치지 않는다.

민주주의 항쟁이었다는 방증”이라며 “광주에서 시작해 광주에서 끝난 게 아니라 지금도 민중이 이어 발전시키고 있다.

여기저기서 불리는 이유”라고 평했다. 




△촛불시위도 매번 참석…역사 소재 장편 서사시 집필 중 

그는 여전히 약자를 위한 집회 현장이라면 늘 맨 앞에 앉아 있다. 이번 5·18 민주화 운동 기념식에도 참석할 계획이다.  

“촛불집회 때도 단 한번 빠진 적이 없어.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늙은이라 뒷간(화장실)을 자주 가야하는데 전날이면 물을 안 먹었지. 개인적 사정이 유별났지만 어려움을 참으면서 촛불을 들었다. 왜곡하지 말고 참된 촛불정신이 사회적, 문화예술적으로 이어졌으면 좋겠어. 온몸이 촛불이 돼서 현장의 제일선에 설 거야.” 

‘임을 위한 행진곡’에서 제일 좋아하는 구절은 ‘산 자여 따르라’다.“비록 초라하게 늙었지만 가만히 있지 않지. 조금이라도 편해지려 하면 부패해. 또 금방 잊는 거지. 예술창작의 기본은 긴장감이야. 정치도, 철학도 긴장감이 없으면 썩지.” 

백 소장은 요즘 장편 서사시를 쓰고 있다고 했다. 비참한 역사적 사실이 소재다. 이달 말까지 마무리하는 게 목표다.

백 소장은 “이제 늙어서 상상력이 풍부하지 않아 걸레를 쥐어짜듯이 짜 낸다”고 말했다.

묏비나리를 쓸 당시를 떠올리며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맑은 샘이 넘치는 이런 상상의 세계를 내가 갖고 있었나? 반문하고 싶을 때가 있다”고 덧붙였다.

예술인들에게는 “블랙리스트로 인해 촛불도 들고 규탄시위도 나서더라. 그게 예술 아니겠나”라고 말했다.

때론 응원가로, 때론 노래방에서 불리는 것에 대해선 호탕하게 웃는다. “이 노래는 특정 개인의 것이 아니야. 노래라는 게 운동 시합하며 부를 수도 있고 술 먹다가도 부를 수 있어. 외로울 때 부를 수 있으면 더 좋고. 재미있게 봐주면 더 좋지. 하하.”



이데일리 장병호 기자














노래를 찾는 사람들 - 임을 위한 행진곡 
- 1991년 4월 8회 정기공연 (세종대 대양홀) -





일본 노조들이 부르는 <임을 위한 행진곡>




중국 농민공들이 부르는 <임을 위한 행진곡?




캄보디아 학생들이 부르는 <임을 위한 행진곡>




태국인들이 부르는 <임을 위한 행진곡>




미얀마 노동자와 학생들이 부르는 <임을 위한 행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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